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부치 게이조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JQ7_XgepRM)]}}}|| [[1937년]] [[6월 25일]] [[군마현]]의 나카노조 마을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북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카노조는 대략 일본의 주요 섬 [[혼슈]]의 중앙에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인 푸른 환경에 있다고 한다. 게이조의 부친은 비단 공장장이었다. 게이조는 오부치 미쓰헤이와 그의 아내 치요의 둘째 아들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당시에 반장을 지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 지방 중학교로 진학한 그는 13세때 당시 중의원으로 있던 아버지의 권유로 도쿄의 유명 사립 중학교인 [[가쿠슈인]] 중등과로 전학했다. 중학생 때는 산수와 자연 과목을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류층만 다녔던 학교였기에 중산층 출신인 오부치는 촌놈, 서민이라고 왕따(...)를 당하게 되어[* 군마 촌동네 양잠업자 출신 중의원 의원의 아들이면 당시 [[화족]]에서 화족제 폐지 이후 얼마 되지도 않은 진짜 귀족의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천박한 촌놈으로 보일 만했다. 이 때문에, 총리 관저 홈페이지에 업로드된 개인 프로필 겸 일대기에 가쿠슈인 중등과 시절에 대한 언급은 지방 중학교에서 가쿠슈인 중등과로 전학했다는 내용만 있을 정도다. [[https://www.kantei.go.jp/jp//obutisouri/profile/bio/bio.html|오부치 게이조의 소년 시절 프로필]].] 가쿠슈인 고등과 진학을 포기하고 다른 공립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후지산]] 등산을 즐겼다고도 한다. 오부치는 부친인 오부치 미쓰헤이(재선 의원)가 4번씩이나 [[낙선]][* 첫 선거에서 낙선, 두번째 선거에서는 당선. 이후에는 3연속 낙선이었다.]하는 것을 보고『죽어도 정치는 하지 않겠다!』며 강하게 의지를 드러내고 고등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국제 무대에서 역할을 맡기 위해 부모님의 뜻과 다르게 문학부 영문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여 1958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 오부치는 역대 [[일본 총리]]들 중 '''유일한 어문계열 전공 총리다.''' 지금까지 문학사 총리는 오부치 본인의 선배이자 [[와세다대학]] 철학과 출신의 [[이시바시 단잔]]뿐이었고, 그 외에 모든 총리들의 전공은 (정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다나카 가쿠에이]]와 [[스즈키 젠코]]를 제외하고) 법학, 정치학, 상학, 그리고 사관학교 출신들이 전부였다. 그나마 나중에 공학부 출신의 [[하토야마 유키오]], 물리학과 출신의 [[간 나오토]]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공계 전공 총리도 없었다.] 입학 후 [[셰익스피어]]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두 번째로 하원에 선출된 후 1958년 54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오부치는 정치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아버지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생 시절 국제무대에 서는 꿈을 접고, 정치가의 꿈으로 전향한 오부치는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것을 경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외국에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가기 위해 접시닦이, 카메라 조수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여 돈을 모아 대학 졸업 직후인 1963년 1월에 무려 9개월 동안 남미, 북미, 유럽, 중동, 스리랑카 등 38개국 장기 여행을 시작했다. 지금도 저 정도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과 요즘 젊은 세대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하기에 나름 시대를 앞선 배낭 여행의 선배로 봐도 무방하다. 그는 워싱턴 여행 중, 모았던 돈을 다 써버린지라 남은 돈으로 당시 동서 냉전 중이던 [[독일]] [[베를린]]에 가서 자신이 카메라 조수 아르바이트 한 것을 경험 삼아 독일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카메라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지고 일일이 뛰어다녔다고 하는데 너무 무거워서 어깨와 허리가 나갈 뻔했다고 하며, 다행히 돈을 마련하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런 여행의 경험으로 여러 사회 현상을 지켜봤고, 또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성실했던 정치인의 모습이나 한국 등 세계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실천적으로 노력한 모습도 여행을 하면서 느낀 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즉, 38개국 여행이 자신이 변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이다. 이 세계여행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영리한 선택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아래 문단에도 적혀 있지만 당시 같은 지역구의 경쟁자 중 거물들이 많았기에, 이들과 경합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청년이라는 이미지를 줄 필요가 있었고 세계기행이 그를 위한 스펙 메이킹이었다는 것. 이와 같이 대학생 시절 아버지의 급서 이후로부터 정치가로서 소양을 쌓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학원 재학 중 아버지의 지반을 이어 총선거에 출마, 26세의 나이로 처음 당선되어 그의 정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선 동기로 동갑내기이며 역시 26세에 당선된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가 있다. 참고로 당시 그의 지역구인 舊 군마현 제3구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후쿠다 다케오]],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 소속 야마구치 츠루오 의원 같은 당대의 거물들이 버티고 있던 곳이었고 중선거구제 하에서 오부치는 나카소네, 후쿠다는 물론 야마구치 츠루오에게도 밀려 4위 턱걸이로 당선된 경우가 많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선거구제 시절 (구) 군마 3구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vs 후쿠다 다케오가 1위 대결을 했고, 야마구치 츠루오 vs 오부치 게이조가 3위 대결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선거구제로 전환된 현재 군마현에도 이들 가문의 영향력이 건재해, 중의원 의원 5명 중 3명이 총리의 혈족이다. [[군마현 제1구]]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손자 [[나카소네 야스타카]], [[군마현 제4구]]엔 후쿠다 다케오의 손자이자 [[후쿠다 야스오]]의 아들인 [[후쿠다 다쓰오]]가 있으며 [[군마현 제5구]]의 [[오부치 유코]]가 오부치 게이조의 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